나는 누군가가 사용하다 방치해둔 쓰러진 탁자 위에 앉아 있다. 숨을 내 쉬면 흰 입김이 하얗게 흩어진다. 오후의 햇살은 서쪽 창으로
봄볕처럼 쏟아지는데, 나는 어쩐 일 인지 숨지 않고 그 햇살에 맞선다. 바르게 걸린 햇볕가리개는 이곳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누수예요.’ 영하
십 오도는 쉽게 넘기는 북부의 날씨. 수도관의 파열은 이 곳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서쪽으로 창을 낸 갸름한 이 건물은 좁은 골목
너머의 옆 건물에 의해 곧 볕이 차단되고, 그러면 다시 순식간에 기온이 내려가면서 어둠이 찾아온다.
발을 디딜 때마다 탕탕 소리가 나는 가파르게 꺾어지는 푸른 계단과, 내가 당신 몰래 손바닥을 활짝 열어 대 보았던, 계단 사이의 나무를
덧댄 튀어나온 공간. 그곳은 누군가가 은밀한 용도로 모아 놓은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가 잊은, 그러니까 오래 된 시계나 꽃병, 은비녀나 가락지
같은 것들이 쌓여 있을 것도 같은 공간인데, 내 손의 온기에 몇 해 동안 쌓여있던 먼지들이 화들짝 놀라, 한 뼘쯤 튀어 올랐다가, 내가 다시 몇
개의 계단을 소리내 내려가는 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려앉아 이 년은 더 그렇게 잠잠히 있을 것만 같은 곳이다.
나는 그런 계단을 갖고 있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계단의 꺾어지는 부분, 며칠째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쓸쓸한
여름 슬리퍼와 세게 밀면 바람을 일으키며 화락, 문이 닫히는 철제 덧문과, 세 놉니다, 같은 딱지가 붙어 있는 외벽 아래, 방심하면 당신을
넘어뜨릴 냉랭한 얼음들이 역시나 백년도 더 전처럼 지금도 있는 그곳에서 팔을 크게 내두르며 휘청 인다. 당신은 아직 계단을 내려오는 중이어서
나를 잡아 줄 수 없고, 나는 그렇게 잃은 중심을 혼자서 천천히 잡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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