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병원의 오층 막다른 길, 치아만 흰 키가 큰 외국인들이 몇 줄지어 앉아 큰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나는 왜 그러세요?
하는 표정으로 그 중 한 사람과 눈을 맞춘다. 그러는 건 무례하고 나쁜 짓 인 줄 알지만, 나는 뭔가에 약간 화가 나 있는 듯 하다. 막다른
곳에 난 작은 창으로 허름하고 어두운 도시가 보인다. 헐벗은 활엽수가 가시처럼 나 있는 등성이와 그 아래 무허가 절 같은 곳이 보이고, 미국의
깃발이 펄럭인다. 주머니의 지폐를 염려하는 옆자리 할머니는 몇 번이나 돈을 꺼내 세면서 힐끔힐끔 나를 경계한다.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내내
나쁜 표정으로 지내다 두통을 얻는다. 제발 외롭다고 좀 하지 마, 언제 T가 바닷가까지 불편한 몸으로 찾아와 내게 했던 얘기를 기억한다. 다정한
H씨, 재밌는 얘기라며 꺼낸 옛 애인 얘기보다, 그러는 H씨가 더 재밌어서, T가 이층 계단이 있는 커피하우스를 힘겹게 목발로 올라갈 때,
미치게 후회했던 스물 일곱 개의 계단과, 외롭다고 좀 하지마, 하던 H씨 같은 다정한 목소리의 T를 기억하고 표정을 푼다. 세상은 은유가 좀
필요하지, 우리는 그런 농담을 잘도 했었는데 벌써 나는 은유도 잊어서 자꾸 두통이다. 통로를 지나는 내 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는 저 외국인들은
아무래도 루돌프가 그려진 술이 있는 내 빨간 목도리가 마음에 드나보다. 그때 유 간호사, 레이니어씨, 하고 크게 부른다. 나는 네에,
하고 서둘러 걷지만 몇 주 째 거르지 않고 받는 근육통 치료는 어쩐지 엄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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