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ffiti

할머니의 소원

Graffiti 2006. 1. 8. 16:17

어느날, 양로원을 방문했을 때 할머니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후
“할머니, 할머니의 제일 큰 소원이 무엇이지요?”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한 할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제 소원은 누구하고 실컷 이야기하는 것이지요.”정말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노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위로랍시고
조그마한 선물 상자를 안고 찾아갔던 제 모습이 그렇게 초라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이나미 선생은 「사랑의 독은 왜 달콤한가?」라는 책 속에서
우리 부모님들은 아버지 이전에 남자이며 어머니 이전에 여자이고,
뜨거운 감정을 가진 분들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들의 생각만으로
효도를 다한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이나미 선생은 노인의 이성에 대한 사랑을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주제 넘는 억압이고 편견이라고 말합니다.
또 박완서 님의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는 60세 홀어머니의 연애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속버스 안에서 우연히 만난 노신사와의 달콤한 만남.
자신도 잊었던 여성의 이미지를 다시 발견하는 어머니,
그 후에도 만남은 이루어지고, 자녀들이 어머니의 재혼을 권고는 하지만…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낍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선이라는,

또 효도라는 미명아래 오히려 이웃들에게 상처를 안겨 주고,
부모에게 외로움을 안겨 드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질적 도움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녀들.
저 역시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 노인대학을 설립하고,
일년에 한두 차례 위로 잔치 베푸는 것으로
노인들에 대한 사목을 훌륭하게 했다고 자부했었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의 진정한 소원을 도외시하고
자선의 미명아래 오히려 외로움만을 더해 드렸음을 늦게야 알았습니다.
참된 나눔은 참된 사랑이 바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이웃이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제발이지 새해에는 정이 그리워 외로움에 우는 이웃이 없었으면 합니다.
한마디만 더 한다면 서울역 노숙자가 일하기 싫어서 저런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그들의 아픔을 덜어 줄 일은 무엇인지 찾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알코올 중독증에서 회복되고도 가족을 포함한 우리들의 선입견과
냉대 때문에 고뇌하는 치유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홀로된 부모님의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황혼의 결혼을 생각하는 자녀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와 알아보실 때 핑계를 버리고
자주 찾아보기로 결심하는 자녀들이 많이 많이 탄생하는
사회복지주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허근 바르톨로메오 신부/가톨릭 알코올 사목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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