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구나
얼쭈 10년 되어가지?
내가 네게 편지를 보내고 너가 내게 편지를 보낸 후, 그리고 끝이었지.
맞아! 한번은 너와 다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차일피일이 이젠 10년이 지나고 있다
그날이 언제일지 가슴 졸이며 세월을 낚고 있었는데, 오늘이구나
너의 어머니가 나에게 직접적인 동기와 그리고 너를 향한 네 어머님의 그리움이 나를 더욱 용기있게 만든거다
가끔 너의 이름을 되뇌어보지만 이렇게 활자로 너의 이름을 적어본지가, 그래 10년이 되어간다
너 아냐?
볼펜이나 필기구를 구입할 때 종이에 잘 써지나 긁적일 때
내가 너의 이름을 너는 나의 이름을 썼다는 것을 .....
그리고 다음 이야기는, 넌 모를거야!
너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 보내고 친구라는 용어를 아무에게도 붙이지 않았다
너가 유일한 친구인양, 다른 친구들에겐 그런 호칭을 사용하기 싫었었다
이젠 네게 미움보다는 그리움이 좀 더 커져서 이렇게 너를 불러본다
인.관.
2010년 10월 30일은 너의 조카 은정이의 결혼식이었다
네 매형한테서 전화가 왔더구나
결혼식 사진을 찍어 달라시더라구
분명히 웨딩 사진을 맡겼을텐데 괜히 나를 예식장에 초청하는 것이 민망해서 그런 부탁을 하셨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청첩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셨는데 겉봉에 쓰인 내 이름이 김영수였던거 재밌지 않냐?
만약에 동네 사람이 내 이름도 모르면서 잘못적은 이름으로 나를 초청했다면 기분이 상했겠지만
난 네 매형이 보내준 다른 이름의 청첩이 너무 반갑고 고맙더라구
인숙 누나와 매쳥을 만날때면 기뻐서 축하받고 싶거나 슬퍼서 위로받고 싶을 때
제게도 알려주셔야 합니다 하고 부탁을 드렸었거든
잊지않고 알려준 고마움과 나를 동생처럼 생각해준 배려심이 그깟 잘못적힌 이름이 대수가 아니더라구
혹시 몰라 카메라를 챙겨서 스튜디오를 닫고 집사람과 마포에 있는 서울 가든 호텔로 갔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너와의 40여 년이 주마등같이 스치며
항상 풀어야할 숙제로 남아있는 너와의 단절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너가 알다싶이 난 소심하고 세심한 놈이다
상처 받으면 오래가고 그래서 화해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3년 전 이었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마음도 울적하고 너와의 의절도 마음 한켠이 묵직해
미국행을 결정하고 비자도 받아두었다만 피치못할 이유로 네게 가지 못했다
미국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그당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는지 모른다
'일단 무조건 만나보는거야'
내가 너를 주먹으로 칠지 너가 내게 한 방 먹일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른 입장 차이를 이해 시켜야 하는건지
아니면 한번에 2001년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쳐박고 독한 술을 확 부어버려야 할지
내가 너를 만나러 바다를 건넜는데 너의 고집이 나를 만나줄지
일단 내가 너에게 가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은 나도 반성하고 너를 용서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내년에는 미국에 가보도록 노력해 보마
호텔에 도착하니 결혼식이 막 시작되고 앞 부분에 매형과 누나가 앉아있었다
물론 내가 사진을 찍을 필요는 없었다
그거아니?
이젠 내 나이도 어디가서 카메라를 잡기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이젠 퇴물이지
너의 어머님을 찾아보려 아무리 둘러봐도 안보였다
혹시나 해서 접수를 보는 사람에게 가서는 은정이 외할머니가 오셨는지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하더라
너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 접수대엔 너와 내가 있었을텐데
다시 식장에 들어가서 신부측 테이블을 모두 둘러봤다
몇 번을 둘러 보고나서야 네 어머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어머님을 뵌지는 5년이 넘었나 보다
너가 미국을 가고 가끔 갔었는데 어머님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피하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 만나주시고 집에 항상 없으시다 하고
(감은 잡았지만 어머님이 나를 보면 네 생각이 나서 피하셨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이제는 우리 집에도 놀러 오실거고 내가 가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놓고 맞이해 주겠다며 눈시울이 빨개지셨다)
어머님을 못 뵈는 날에는 인숙 누나와 이야기를 하다가 오거나
매형을 만나는 날이면 술을 거나하게 먹다가 오기도 하곤 했었지
돌아올때면 만류하는 누나의 손에 어머님께 용돈을 전해달라며 놓곤 왔다
오로지 용돈만이 어머님을 못뵙고 오는 서운한 내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었지
멀리서 바라본 어머님은 정정하게 보이시더구나
나는 예식이 진행중이었지만 벌떡 일어나 어머님께 갔다
그 테이블엔 너의 사촌 형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들과
어머님과 동년배 정도 되시는 분들과 같이 계셨다
다가가는 도중에 어머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처음엔 못알아 보시더라
더욱 가까와 지면서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땐 어머니의 입술이 놀란 모습을 대신하며 내 손을 덥썩 잡으셨다
손은 고와서 작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손처럼 부드러우셨다
예식중이라 큰 절을 올릴수도 없었고
그냥 한쪽 무릎을 꿇고 반가움을 눈물로만 대신했다
안그래도 혹시나 내가 오려나 어머니께서 기대를 하셨다더구나
어머님도 울음을 삼키며 내가 반갑다고 인관이 너가 그립다고 너와는 연락이 되냐며 묻고 계시지만
난 눈물을 삼키느라 한만디도 대답을 못하고
아무리 눈물을 멈추고 말을 하려해도 울음이 목을 막아버려 도저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해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끄덕 거리는 것으로 그냥 대답을 대신했다
대답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것 같아 자리로 다시 돌아왔지만
식사로 나온 스테이크를 먹기엔 눈물이 자꾸 흘렀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과
너에 대한 미안함, 그리움 그리고 야속함까지
또 돌아가신 나의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져
눈물을 멈출수 없었다
내 부모님 살아계시던 생전에 산청 고향에 다녀오던 그 날처럼
아버님은 자동차 옆에서 조심히 운전하라며, 어여 가라며 흔드시던 손짓과
등이 굽어진 어머님은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과 오버랩되며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신랑 신부의 행진이 끝나고 매형과 누나에게 축하 인사를 다시하고
남들이 모두 떠난 테이블에 앉아 어머님과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도중에 친척들이 어머님께 용돈을 드리러 오기도 하고 인사도 드리고 떠나가는 중에
오랜만에 경근이 형도 보고 너가 직원으로 썼던 사촌 동생들도 두 명 보았다
우성이와 우정이는 끝내 보이지 않더구나
그런데 일본에서 온 동생 인옥이가 왔다-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단다-예전엔 통통했었는데
인옥이도 어언 20년 만에 본셈이니 못알아 볼뻔 했단다
살이 살짝 빠지고 50대를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꼈다
인옥이와 집사람이 동갑이잖니-둘이서 반갑게 손잡고 인사 나누는 모습에서 다시 마음이 짠해지더구나
어머님은 인옥이가 많이 도와줘 사는것은 힘들지 않다며 걱정말라며 인옥이를 치켜 세우시고
두 손자는 훌쩍 커 제 엄마 옆에 서있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너와 인혜 누나가 떠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사연을 어제 일같이 기억하시며
안타까움과 그리움과 서운함을 말씀하시고
살아서 너와 인혜 누나를 못만나더라도 잘지냈으면 하는 어머니의 간절함을 말씀 하실때는 눈시울이 다시 붉어지셨단다
"영수 너가 한번 갔다오지 않았니?"
"가려고 미국 비자까지 받아 두었다가 일이 생겨 못갔어요."
어머님의 간절한 마음에 위로를 해드리려 내가 선뜻 대답했단다
"어머님 제가 조만간 한번 갔다올게요."
대답은 해놓고 슬쩍 걱정이 되더라
이 글을 어떤 경로를 통해서라도 네게 보낼건데
마음에 준비나 해 두어라
내가 널 만나러 가니, 첫 인사로 나를 부둥켜 안고 울지 아니면 나와 이국땅에서 한판 붙을지
모두들 떠나간 텅 빈 예식장엔 새로운 예식이 시작되려는지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치시며 마다하는 어머님께 집사람이 준비해간 용돈을 드리고
나는 작별 인사를 드리려 안아 드렸는데 다시 울음이 왈칵 쏟아져 오래도록 안고 있었단다
어머님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만 숙여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서서 계단으로 한층을 중간정도 내려 갔는데
"영수야 잘가라. 조심히 가고 다음에 꼭 보자"는 뒤따라오신 어머님의 마음 담긴 말씀에
"어머님 건강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울보인 내가 또 눈물을 삼키느라 허리를 깊숙히 숙여 어머님의 건강기원을 대신했다